서울에서 만나는 고흐의 별밤, 그리고 예술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서명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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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2월,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 생활의 암울함을 뒤로하고 강렬한 태양을 찾아 프랑스 남부 아를로 떠났다. 따뜻한 기후와 소박한 정서에 매료된 그는 특히 론강 위로 펼쳐진 밤 풍경에 깊이 빠져들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밤하늘에 가득히 빛나는 별들과 론강의 정취가 마치 아름다운 꿈같았다”며 당시의 벅찬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인 걸작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바로 이 순간 탄생했다.

오르세의 걸작, 서울에 상륙하다

이 고흐의 걸작을 포함한 오르세 미술관의 방대한 컬렉션이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을 찾았다. ‘2011 오르세미술관전-고흐의 별밤과 화가들의 꿈’이라는 타이틀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고전주의부터 후기 인상주의에 이르는 서양 미술사의 황금기를 조망한다.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주의 회화 전시실 보수 공사라는 특수한 상황 덕분에 평소 국외 반출이 극도로 까다로웠던 작품들이 서울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관람객들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외에도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폴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르누아르의 <소년과 고양이>, 밀레의 <봄> 등 교과서에서나 보던 명작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 여기에 드가의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이나 모네의 <임종을 맞은 카미유> 같은 작품들도 포함되어 회화 73점, 데생 24점 등 총 134점의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명작들은 작가의 붓터치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역사가 되어 관람객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작품의 완성을 알리는 보증수표, 서명

전시장에서 만나는 걸작들이 예술적 감동을 준다면, 미술 시장의 냉정한 현실에서 작품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작가의 ‘서명(Signature)’이다. 뉴욕 크라운 포인트 프레스의 디렉터로 활동했던 킴 슈미트는 수많은 거장들과 판화 작업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 철칙을 고수했다. 서명과 번호(에디션 넘버)가 기입되지 않은 작품은 절대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엄격한 감시자처럼 작가들이 인쇄된 판화를 검수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은 작가가 보는 앞에서 즉시 파쇄되었다. 슈미트는 “서명되지 않거나 번호가 없는 작품이 시장에 떠도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철저한 품질 관리를 강조했다. 하지만 작가 입장에서 수십 장의 판화에 일일이 ‘1/50’, ‘2/50’과 같이 번호를 매기고 서명하는 일은 지루하고 고된 작업이다. 슈미트는 리차드 에스테스 같은 작가들이 서명 반복으로 지쳐 글씨가 흐트러질 때면, 잠시 작업을 멈추고 초밥을 먹으며 휴식을 권하기도 했다. 이는 작가의 인내심을 회복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끝까지 유지하려는 전략이었다.

서명의 유무가 가르는 천문학적 가치 차이

작가의 서명은 단순히 이름을 적는 행위를 넘어선다. 맨해튼의 갤러리 오너 에드윈 후크는 서명에 대해 “이 작품은 완성되었으며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작가의 선언”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선언은 곧 금전적 가치로 직결된다. 서명이 없는 작품은 판매 가격이 낮거나, 판매되기까지 훨씬 긴 시간이 소요된다. 서명이 없다는 것은 작가가 작품을 불만족스럽게 여겨 폐기하려 했거나 미완성 상태로 남겨두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슈미트는 딜러로 활동하면서 엘스워스 켈리의 서명이 없는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 대부분 거절했다고 한다. 켈리처럼 꼼꼼한 작가가 서명을 하지 않았다면, 그 작품에는 작가가 간과하지 못한 결함이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명이 없는 작품을 거래하려면 해당 작품이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어 정식으로 판매, 전시되었다는 복잡한 증빙 서류가 필요해진다.

시장 논리가 만들어낸 서명의 변주

흥미로운 점은 때로는 작품성보다 서명 자체가 경제적 가치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살바도르 달리나 마르크 샤갈 같은 작가들은 훗날 자신들의 유명 작품 복제품에 사용될 수 있도록 백지에 미리 서명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예술적 진정성보다는 상업적 수요를 반영한 사례다.

또한 사후에 유족이 서명을 대신하여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피카소의 손녀 마리나 피카소는 조부의 판화 시리즈를 발행하며 자신의 서명을 남겼는데, 그녀의 필체는 피카소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최근에는 장 미셸 바스키아 재단이 바스키아의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 스크린프린트 에디션을 발행하며 작가의 여동생들이 서명하기도 했다. 이 경우 작가는 완성된 판화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유족과 재단의 보증을 통해 시장에서는 공인된 원작에 준하는 가격으로 거래된다.